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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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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마니아 정교회는 루마니아의 주요 종교로, 14세기부터 루마니아 지역에 수도대주교구가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20세기 초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치 교회가 되었으며, 현재 루마니아어 전례를 사용한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192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루마니아 정교회 신도들을 통합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4개의 주교구, 신학대학, 신학교, 수도원 등을 운영하며, 사회적 역할과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몰도바에도 관할권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정교회와의 관계 및 일본 정교회와의 관계에서 일부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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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정교회
일반 정보
명칭루마니아 정교회
로마자 표기Biserica Ortodoxă Română
약칭ROC (영어), BOR (루마니아어)
종류동방 기독교
분류정교회
신학동방 정교회 신학
전례비잔틴 양식
언어루마니아어
본부부쿠레슈티, 데알룰 미트로폴리에이
관할 지역루마니아, 몰도바
해외 관할세르비아 (다키아 펠릭스 교구)
헝가리 (줄라 교구)
서유럽 및 남유럽, 독일, 중앙 및 북유럽, 미주 루마니아 정교회,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관련 단체정교회
웹사이트루마니아 정교회 공식 웹사이트
통계
수장루마니아 총대주교,
주교 수58명
사제 수15,068명
본당 수15,717개
수도자 수남자 2,810명, 여자 4,795명
수도원 수359개
신자 수루마니아 16,367,267명2011 루마니아 인구 조사., 몰도바 720,000명, 미국 11,203명
조직
정치 체제주교제
교구우크라이나 정교회 비카리아트 시게투 마르마치에이, 주님의 군대
역사
설립(루마니아의 수도 대교구로서)
니폰 루사일러, 카롤 1세
(루마니아 총대주교청으로서)
미론 크리스테아, 페르디난드 1세
독립1865년
승인1885년 4월 25일 (독립적인 대교구)
1925년 (독립 총대주교청)
분리구력 루마니아 정교회 (1925년)
루마니아 복음주의 교회 (1927년)
루마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 (1990년)
합병루마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 (1948년)
출판물
출판물지아룰 루미나
기타
관련러시아 정교회와 분쟁 중(몰도바)

2. 교회의 역사

14세기 루마니아 지방에 최초의 수도대주교구가 세워졌으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부터 독립하여 루마니아 총대주교구가 설치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성서와 전례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9세기에 완료되었다. 현재 루마니아 교회의 전례 언어는 루마니아어이다.

1925년 이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내 루마니아 정교회 신도들을 1865년 몰다비아왈라키아에 설립된 독립 루마니아 교회와 통합하여 현재의 루마니아 정교회가 만들어졌다. 1885년 콘스탄티노플 정교회 본부의 승인을 받았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14개 주교구로 나뉘어 있으며, 부쿠레슈티시비우에 2개 신학대학, 6개 신학교, 전국에 많은 수도원이 있다. 루마니아 정교회에는 오래된 교회 유적들이 많다. 특히 루마니아 북동부 수체아바주에 있는 15~16세기 건설된 5개 수도원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48년 루마니아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교회는 외부적으로 통제를 받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 정권에 의해 어느 정도 용인되었다. 정권의 탄압은 주로 개별 신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교회 구성원들의 태도는 반대와 순교에서 침묵, 협력, 생존을 위한 복종까지 다양했다.

루마니아 혁명으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된 이후, 루마니아 정교회는 공산주의 정권의 통제에서 벗어나 민주화 시대를 맞이했다.

2. 1. 초기 기독교 전래와 발전

루마니아에 최초의 수도대주교구가 세워진 것은 14세기 때였으나, 20세기에 이르러 루마니아 총대주교구가 설치되면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성서와 전례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9세기에 완료되었다.

일부 루마니아인들은 루마니아 정교회가 유럽 최초의 국가적 규모의 정통적인, 그리고 사도들이 세운 교회라고 믿는다. 이 전승에 따르면, 루마니아 교회는 성 안드레아에 의해 창건되었다.

역사가들은 로마 제국이 현재의 루마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생각한다. 로마의 속주로서 루마니아에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믿어졌던 모든 종교, 미트라교를 포함하여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기독교는 아마도 일리리아 로마 군단에 의해 전파되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이 도나우 강 하구 북쪽 지역을 영토로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마 군대가 이 지역에 상주한 것은 106년부터 276년 사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문화는 이 지역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다키아인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로마 문화를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 결과, 어떤 교부의 증언에 따르면, 이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너무 많은 대표"를 파견할 정도였다.

루마니아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었을 때, 그들이 이미 기독교를 믿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전승과 함께 고고학적·언어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 루마니아어의 기본적인 기독교 용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예를 들어, 교회 ("biserică" < basilica), 하나님("Dumnezeu" < Domine Deus), 부활절("Paşte" < Paschae), 이교도("Păgân" < Paganus), 천사("Înger" < Angelus) 등이다. 특히, 교회를 의미하는 ''Biserica''는 루마니아 정교회 고유의 것이다.

루마니아인의 이름에는 슬라브인의 영향이 들어오기 이전의 로마 교회의 영향이 남아 있다. 성인의 이름은 모두 라틴어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Sântămăria"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Sâmpietru" (성 베드로), Sânmedru (성 데메트리우스)와 같다. "Sânziana"나 "Cosânzeana" (성스러운 디아나 또는, 매우 성스러운 디아나) 와 같은 기독교 이전의 관습을 남긴 용어는 이 문맥에서는 삽화적인 의미밖에 갖지 않는다. 루마니아인의 신앙에는 기독교 이전 다키아인의 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악 신앙, 종교적 행렬, 역법, 그리고 초기 교회의 지리적 위치는 분명히 다키아인 고유의 신앙에서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 안드레아조차도 루마니아에서는 "늑대의 사도"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늑대의 머리가 다키아인의 전투 의지를 고무하는 상징이었다는 오래된 맥락에 놓일 수 있다.

4명의 순교자의 무덤 - 루마니아, 니쿨리첼(Niculițel)


4명의 순교자의 무덤에 새겨진 글자 - 조티코스(Ζωτικός), 아탈로스(Άτταλος), 카마시스(Καμασις), 필립포스(Φίλιππος)의 이름


다키아가 짧은 기간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것과 달리, 소스키티아(오늘날의 도브로자)는 오랜 기간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소스키티아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소스키티아가 처음으로 기독교와 접촉한 것은 사도 안드레아( 베드로의 동생)가 1세기에 제자들과 함께 이 지역을 통과했을 때라는 전승이 전해진다. 이후 기독교는 소스키티아에서 우세한 종교가 되었다. 이것은 많은 초기 교회 유적에서 증명된다. 로마 제국의 관리들은 기독교인들에게 가혹하게 요구하여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다.

토미스에서 304년 3월 7일에 순교한 주교 에프렘은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후 수많은 순교자가 뒤를 이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갈레리우스 황제, 리키니우스 황제,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순교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 시대, 수많은 주교좌와 교회의 순교자들이 시련을 겪었다. 알려진 최초의 다키아-로마인 사제 몬타누스와 그의 아내 막시마는 304년 3월 26일에 기독교 신앙 때문에 익사형에 처해졌다.

1971년에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니쿨리첼(고대 소스키티아 노비오두눔 근처) 초기 기독교 바실리카 아래에서 더 오래된 순교자 기념당이 발견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통치하에 304년부터 305년에 순교한 조티코스, 아탈로스, 카마시스, 필립포스 외에, 데키우스 황제(249년-251년)의 박해 때 죽은 더 오래된 두 순교자의 불멸체(유해)가 지하실에서 나왔다. 이 순교자들의 이름은 교회에 있는 기록에서 알려져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무덤의 발견은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아타나릭의 지배하에 372년 4월 12일에 강에서 익사형으로 순교한 저명한 성인 고트의 성 사바의 불멸체가 바실리우스에 의해 되찾아졌다는 것은, 사바가 아리우스파와 같은 이단이 아니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정된 신앙의 편에 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키아 출신 황제 갈레리우스311년 로마 제국 전역에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자, 토미스 도시(현재의 콘스탄차)는 다른 14개 주교좌와 함께 대주교좌가 되었다.

2. 2. 중세 시대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와 불가리아 제국 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결과로, 루마니아에서는 9세기 초에 교회 슬라브어에 의한 예배가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 문서의 대부분은 슬라브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신자들이 예배문을 이해하기를 바랐거나, 또는 그 양쪽 모두인 루마니아인 성직자가 배우는 것이었다. 어떤 성직자들은 설교할 때, 몇몇 슬라브어 접두사를 사용하여 중얼거렸다. 그러면 슬라브어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도나우 강 남안의 다키아는 "Vlahia Mare"(대왈라키아)로 알려져 있었고, 북안은 "Ungro-Vlahia"(헝가리·왈라키아)로 알려져 있었다. 이 중요한 지리적·민족사적 사실은 현재도 루마니아 교회 안에 대주교 중 수장인 「웅그로-왈라키아」대주교청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웅그로-왈라키아 대주교좌는 1359년에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에 설치되었다. 두 번째 대주교좌는 1401년몰도바의 수차바에 설치되었다.

2. 3. 근현대

14세기루마니아 지방을 관할하는 최초의 수도대주교구가 세워졌으나, 20세기에 이르러 루마니아 총대주교구가 설치되면서 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로부터 독립하였다. 현재 루마니아 교회의 전례언어는 루마니아어이다. 성서와 전례서를 루마니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9세기에 완료되었다.

1925년 이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내 루마니아 정교회 신도들을 1865년 몰다비아왈라키아에 설립된 독립 루마니아 교회와 통합하여 현재의 루마니아 정교회가 만들어졌다. 1885년 콘스탄티노플 정교회 본부의 승인을 받았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14개 주교구로 나뉘어 있으며, 부쿠레슈티시비우에 2개 신학대학, 6개 신학교, 전국에 많은 수도원이 있다. 루마니아 정교회에는 오래된 교회 유적들이 많다. 특히 루마니아 북동부 수체아바주에 있는 15~16세기 건설된 5개 수도원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850년 인구 조사에 따른 트란실바니아의 정교회 신자


1930년 인구 조사에 따른 루마니아의 정교회 신자 (트란실바니아, 바나트, 크리샤나, 마라무레슈, 부쿠레슈티에 대한 데이터만 있음)


2002년 인구 조사에 따른 루마니아의 정교회 신자


현대 루마니아 영토 내 정교회 위계는 1865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관할이었다. 몰다비아왈라키아 교회들은 니폰 루사일러를 최초의 루마니아 총대주교로 지명하며 교회 독립을 시작했다. 1863년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공작은 수도원 재산 몰수를 단행하고, 1865년 공국 내 교회의 총대주교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872년, 운그로왈라키아 대주교구와 몰다비아 및 부코비나 대주교구가 합병하여 루마니아 정교회가 형성되었다.

1878년 국제적으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연합 공국(후에 루마니아 왕국)의 독립이 인정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아힘 4세는 1885년 루마니아 자치 대주교구를 인정했고, 이는 1925년 총대주교청으로 승격되었다.[4]

19세기 말 루마니아 정교회 신학 교육은 저개발 상태였다. 시비우 신학 연구소는 교수진 중 신학자가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역사가, 언론인, 자연 과학자, 농학자였다. 사제 교육은 전문화보다는 실용적이고 일반적인 것에 초점을 맞췄다. 20세기 초 사제 교육 과정에는 위생, 서예, 회계, 심리학, 루마니아 문학, 기하학, 화학, 식물학, 체조 등이 포함되었다. 교회 음악, 교회법, 교회사, 주석학에 큰 비중을 두었다.[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새로운 지역의 교회들을 통합하기 위해 대규모 재편성이 필요했다. 교회는 교회법에 대한 통일된 해석을 수립하고,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성직자들에게 지불할 공공 기금을 관리하고, 국가와의 관계를 관리해야 했다. 1925년 5월 6일 루마니아 의회가 채택한 "루마니아 정교회 조직에 관한 규정"은 178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루마니아 정교회 기능에 관한 법률은 46개 조항이었다. 입법자들은 트란실바니아의 성직자와 평신도를 행정 회의에 혼합하는 전통을 채택하고 주교들에게 루마니아 상원 의석을 부여했다.[6] 니키포르 크라이닉, 요안 사빈, 두미트루 스터닐로에 같은 많은 젊은 신학자들이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들은 루마니아로 돌아와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신학교 형성에 기여했다. 갈라 갈락시온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 이 시대 루마니아 정교회 신학자들은 민족주의를 받아들여 학문적 저술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었다.[5]

1920년대 후반은 A.C. 쿠자 또는 철십자단 창립자 코드레아누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루마니아 정치에서 반유대주의가 급증한 시기였다. 교회 간행물에서도 반유대주의가 두드러졌다. 1925년 교회 잡지 "Revista Teologică (신학 논평)"는 시비우 교수이자 사제인 폼필리우 모루슈카의 반유대주의 기사를 게재했다. 모루슈카의 기사는 부코비나 루마니아인들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유대인들을 비난했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1930년대에 다양한 형태의 반유대주의를 발전시켰다.[7] 1927년 콘코르다트는 반가톨릭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6]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서는 강 양안에서 교회 생활이 풍부하게 꽃피웠다. 도나우 강 북쪽 기슭의 루마니아인들을 담당하는 대주교 관구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처음 설립되었다. 이는 이 지역의 정치적 발전을 반영했다. 많은 종교 문서가 정기적으로 필사되었지만, 16세기까지는 교회 슬라브어만 사용되었다.

베로네토 코덱스와 부쿠레슈티 성서(''Biblia de la București'') 같은 루마니아어 성서 전권의 초기 번역이 17세기 말에 나타났다. 왈라키아에서는 세르반 칸타쿠지노(Șerban Cantacuzino) 통치 시대인 1688년에 성서가 출판되어 완성된 작업으로 받아들여졌다.

루마니아어 성서 번역은 영어의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에 필적하는 문화적 중요성을 지닌다. 역사가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에 의해 "비잔티움 이후의 비잔티움"이라고 불린 운동에서, 동로마 제국에 유래한 풍부한 사본이 도나우 강 북쪽 기슭으로 가져와져 성서 번역과 연결되었다.

루마니아어 성서 간행으로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교회 슬라브어와 그리스어의 중요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1736년은 왈라키아에서 교회 슬라브어 예배서가 출판된 마지막 해였다. 1863년에 루마니아어는 공식적으로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몰도바와 왈라키아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고, 트란실바니아가 헝가리의 영토였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루마니아인들은 정교회 신앙을 민족적 정체성의 일부로 유지해 왔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1885년에, 그 이전의 자치 교회에서 독립 교회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났다.

2. 4. 공산주의 시대

1948년 루마니아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교회는 외부적으로는 통제를 받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 정권에 의해 어느 정도 용인되었다. 정권의 탄압은 주로 개별 신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교회 구성원들의 태도는 반대와 순교에서 침묵, 협력, 생존을 위한 복종까지 다양했다.

루마니아 노동자당은 정교회 지도부를 숙청하고, "비협조적인" 주교와 대주교들을 체포했다. 1947년 5월 법령으로 성직자 정년 퇴직 연령을 강제하고, 1948년 8월 법률로 주교 선출에 대한 국가 통제를 제도화하여 성 시노드를 공산주의 지지자들로 채웠다. 복음주의 계열의 루마니아 정교회인 주님의 군대는 1948년 공산주의 당국에 의해 진압되었다.

정부는 루마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교회 건물과 자산을 정교회로 이전하고, 주교와 사제의 급여, 종교 서적 출판 등을 지원했다. 또한, 반공주의 성직자들을 제거하고 친정권 성향의 비밀 경찰이 침투한 민주 사제 연합을 설립하여 교회의 협조를 얻으려 했다. 1953년 1월까지 약 300~500명의 정교회 사제가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니코딤 대주교 사망 후 유스티니아누가 후임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1947년~1948년, 국가는 정교회 운영 학교를 인수했고, 1958년~1962년에는 교회에 대한 새로운 탄압으로 수도원 절반 이상이 폐쇄되고 2,000명 이상의 수도사가 세속 직업을 갖도록 강요당했으며, 약 1,500명의 성직자와 평신도 활동가가 체포되었다. 유스티니아누 대주교는 정권의 정치적 기준에 맞는 공개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에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주의했다.

1962년, 루마니아가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면서 교회와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교회는 민족주의적 단체로서 정권의 파트너로 간주되기 시작했고, 1975년까지 교구 성직자 수는 약 12,000명에 달했으며, 8개의 신학 논문을 출판했다. 정교회 성직자들은 차우셰스쿠 정권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국내 정책 비판을 자제했으며, 소련과 헝가리에 대한 루마니아 정부의 입장을 옹호했다. 1989년에는 두 명의 대주교가 대의원회에 참석했다.

교회 지도부와 성직자들은 1980년대 부쿠레슈티의 역사적인 교회 철거와 체계화 계획 발표에 대해 대부분 침묵했다. 주목할 만한 반대자 게오르게 칼치우-두미트레아사(Gheorghe Calciu-Dumitreasa)는 투옥 후 추방되었다.

동방 정교회는 국가에 대한 복종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 사도직"이라는 새로운 교회론을 제시했다. 유스티니아누 대주교가 개발한 이 교리는 교회가 세속 정부에 충성을 빚고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실레스쿠(Vasilescu) 신부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인용하여 기독교 전통에서 사회 사도직 교리의 근거를 찾으려 했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통치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루마니아 혁명 이후, 여러 루마니아 정교회 사제들이 세쿠리타테(Securitate, 비밀경찰)를 위해 협력하거나 정보원으로 활동했음을 인정했다. (Metropolis of Banat) 바나트 대주교 니콜라에 코르네아누(Nicolae Corneanu)는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하는 활동을 "교회 매춘"이라고 비난했다.

1986년, 안토니에 플러머데알러(Antonie Plămădeală) 대주교는 차우셰스쿠의 교회 철거 프로그램을 도시화와 현대화의 일환으로 옹호했다. 교회 지도부는 국제 사회에 알리려는 시도를 거부했다.

1989년 혁명 전까지 종교 단체들의 광범위한 반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테옥티스트 아러파슈(Teoctist Arăpașu) 대주교는 차우셰스쿠를 지지하고 축하했다. 차우셰스쿠 처형 하루 전, 대주교는 그를 "새로운 아동 살해자 헤로데"라고 비난했다.

공산주의 제거 후, 대주교는 사임했으나 몇 달 후 복귀했고, 성 시노드는 "순교자의 용기를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사과했다.

2. 5. 민주화 이후

루마니아 혁명으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된 이후, 루마니아 정교회는 공산주의 정권의 통제에서 벗어나 민주화 시대를 맞이했다.

공산 정권 붕괴 이후, 국가는 교회 재산, 재정, 행정 관리의 여러 측면에 대한 통제를 유지했지만, 교회는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다. 국가는 인구 조사 결과와 "종교의 필요"에 따라 교회에 자금을 지원하며, 정교회 사제, 부제, 고위 성직자의 급여, 은퇴 성직자의 연금, 평신도 교회 직원 관련 경비를 지원한다.[3] 정교회는 급여 지원에 1억유로가 넘는 예산을 배정받고, 교회 건물 건설 및 보수에 추가적인 재정 지원을 받는다. 국가는 정교회 교구에 우대 조치를 취하고 교회 건설 및 구조 유지를 지원하며, 정교회 신학교와 대학의 모든 비용(교사 및 교수 급여 포함)을 충당한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그리스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은 동방 가톨릭 공동체가 문화적, 종교적 말살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루마니아 당국이 동방 정교회의 그리스 가톨릭 교회 파괴를 지지하고 수용한다고 비판했다.[4]

한편, 루마니아 정교회는 동성 결혼 금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5][6] 교회는 동성애이며 비자연적이라고 믿는다.[7]

루마니아의 이웃 국가인 몰도바의 루마니아인 신자들은 베사라비아 대교구에 속해 있으며, 이들은 1812년 러시아 제국베사라비아 병합 이후 약 200년 동안 러시아화 정책에 저항해 왔다. 2001년, 유럽인권재판소에서 베사라비아 교회는 몰도바 정부를 상대로 승소하여 베사라비아와 호친 대주교좌의 정통한 계승자임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여전히 몰도바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며 베사라비아 대교구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00년대에는 일본에 거주하는 루마니아 정교회 신자 수가 약 5000명에 달했다.[31] 2008년 루마니아 정교회 총대주교좌는 "루마니아 정교회 일본 지부" 설립을 결정하고 도쿄와 나고야~미노가모에 사제 2명이 상주하며 활동하고 있다.[32] 그러나 이 "일본 지부" 설립은 일본 정교회 측에 어떠한 연락도 없이 진행되어 분쟁이 되고 있다.[31]

3. 조직

루마니아 정교회는 루마니아 총대주교청 형태로 조직되어 있으며, 최고 의결 기구는 성 시노드이다.

2009년 이후 루마니아 정교회 조직


루마니아에는 6개의 관구장주교구와 10개의 대주교구가 있으며, 교구, 수도원, 사회 센터에서 12,000명이 넘는 사제부제가 활동하고 있다. 약 400개의 수도원에는 3,500여 명의 수사와 5,000여 명의 수녀가 소속되어 있다. 루마니아 국외에는 3개의 대교구와 2개의 교구가 있다. 2004년 현재 루마니아 내에는 15개의 신학대학이 있으며, 14,500개 이상의 성당이 존재한다. 2002년 기준으로 약 1,000개의 성당이 건설 또는 재건 중이었다.

현재 루마니아 정교회 총대주교는 다니엘 총대주교이며, 부쿠레슈티 대주교, 뭉테니아 및 도브루자 대주교, 카파도키아의 가이사레아 대리직을 겸하고 있다.[12][13] 카파도키아의 가이사레아 대리직은 1776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 2세가 수여한 명예직이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테오판, 몰다비아 및 부코비나 대주교[14]
  • 라우렌치우, 트란실바니아 대주교[15]
  • 안드레이, 클루지, 마라무레슈 및 샐라주 대주교[16]
  • 이리네우, 올테니아 대주교[17]
  • 요안, 바나트 대주교[18]
  • 페트루, 베사라비아 대주교[19]
  • 요시프, 서유럽 및 남유럽 대주교[20]
  • 세라핌, 독일 및 중부 유럽 대주교[21]
  • 니콜라에, 미주 루마니아 정교회 대주교[22]

3. 1. 몰도바의 루마니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는 몰도바 내 소수 신자들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베사라비아 대교구에 속한다. 이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키시너우 및 몰도바 대교구에 속한 다수파와는 구분된다.[8][9][10][11]

2001년, 유럽인권재판소에서 베사라비아 대교구는 몰도바 정부에 대해 중요한 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베사라비아 대교구가 1927년부터 1944년 해산될 때까지 존재했던 베사라비아 및 호틴 대주교회의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1947년 그 관할 지역은 러시아 정교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관할 아래 놓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몰도바의 루마니아 정교회에서는 모스크바가 통제하는 키시너우 및 몰도바 대교구에서 베사라비아 대교구로 교구 소속을 변경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변경은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격렬한 논쟁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8][9][10][11]

1812년 러시아 제국베사라비아를 병합한 이후 약 200년 동안 러시아화 정책에 저항해 온 베사라비아 대교구는 2004년 현재 200만 명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 정교회는 여전히 몰도바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며, 루마니아 정교회의 일부로서 베사라비아 대교구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3. 2. 역대 총대주교

이름재임 기간
미론 크리스테아1925년 - 1939년
니코딤 문테아누1939년 - 1948년
유스티니안 마리나1948년 - 1977년
유스틴 모이세스쿠1977년 - 1986년
테옥티스트 아라파슈1986년 - 2007년
다니엘 치오보테아2007년 - 현재


4. 신학 및 특징

루마니아 정교회는 정교회 중 유일하게 로망스어로 예배(봉신례)를 드리는 교회이다.

동로마 제국의 종교 문서에는 루마니아에 독자적인 주교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코레피스코푸스(chorepiscopus) 또는 지역 주교좌라고 불렸는데, 일반적인 대도시의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주교좌와는 대조적이다. 이는 아일랜드의 수도원 주교에 비유할 수 있다. 중세 초기 아일랜드에서는 지방 수도원장의 역할에 다른 지역에서 주교가 수행했던 역할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럽 언어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리스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소집된 자들)에서 유래한 단어가 교회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루마니아어에서는 바실리카에서 유래한 단어(''Biserică'')가 더 일반적이다.

4. 1. 저명한 신학자

두미트루 스터닐로아이(1903–1993)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정교회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동방 기독교 체계 신학의 모든 주요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또 다른 주요 신학적 업적으로는 고전 비잔틴 작가들이 쓴 텍스트들을 편집하고 그리스어에서 번역한 루마니아 필로칼리아(Philokalia)로 알려진, 45년에 걸친 정교회 영성에 관한 종합 연작이 있다.[23]

클레오파 일리에 대주교(1912–1998)는 시허스트리아 수도원(Sihăstria Monastery) 원로로, 현대 루마니아 정교회 수도원 영성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23]

바르톨로메우 아나니아 대주교(1921-2011)는 199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클루지, 알바, 크리샤나, 마라무레슈 대주교였다.

5. 사회적 역할과 과제

루마니아 정교회는 19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으로부터 독립해 자치권을 얻었고, 1925년 총대주교청으로 승격되었다. 19세기 말 루마니아 정교회 신학 교육은 저개발 상태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 확장에 따라 교회는 재편성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법 해석, 성직자 급여, 국가와의 관계 등 여러 과제에 직면했다.

1920년대 후반 루마니아 정치에서 반유대주의가 급증하면서 교회 간행물에도 반유대주의가 나타났다. 나치 독일의 부상은 루마니아를 제국의 신학적 사상에 노출시켰고, 이는 반유대주의에 익숙했던 루마니아 정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1930년대 후반 신학자들의 저술에서 이러한 경향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 정교회는 유대 볼셰비즘 개념을 지지하는 선전을 제작하고, 트란스니스트리아 총독부에서 유대인 학대에 참여하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부 성직자들은 유대인을 위해 중재하기도 했다.

1944년 쿠데타 이후 루마니아는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편을 바꾸었고, 교회는 새로운 정치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교회는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 정권에 의해 어느 정도 용인되었다. 교회는 국가에 협력하면서 생존을 모색했고, 일부 성직자들은 세쿠리타테의 정보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이후 교회는 국가 통제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동방 정교회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루마니아 정교회는 동성 결혼 금지를 지지하는 등 사회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몰도바에서는 베사라비아 대교구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키시너우 및 몰도바 대교구와 관할권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몰도바 내에서 교구 소속 변경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5. 1. 사회적 역할

루마니아 영토 내 정교회는 1865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의 관할 아래 있었다. 몰다비아왈라키아 공국 교회들은 니폰 루사일러를 초대 총대주교로 지명하며 독립을 시작했다. 1863년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공작은 수도원 재산 몰수를 단행하고, 1865년 공국 교회의 독립을 선포했다.

1872년 운그로왈라키아 대주교구와 몰다비아 대주교구가 합병하여 루마니아 정교회가 형성되었다. 1878년 국제적으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연합 공국(이후 루마니아 왕국)의 독립이 인정된 후, 요아힘 4세는 1885년 루마니아 자치 대주교구를 인정했고, 1925년 총대주교청으로 승격되었다.[1]

19세기 말 루마니아 정교회 신학 교육은 저개발 상태였다. 시비우 신학 연구소는 교수진 중 신학자가 한 명뿐이었고, 사제 교육은 실용적이고 일반적인 것에 초점을 맞췄다. 20세기 초 교육 과정에는 위생, 서예, 회계, 심리학, 루마니아 문학, 기하학, 화학, 식물학, 체조 등이 포함되었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은 영토를 확장했고, 루마니아 정교회는 이 지역 교회들을 통합하기 위해 재편성이 필요했다. 교회는 교회법에 대한 통일된 해석을 수립하고, 성직자 급여와 국가 관계를 관리해야 했다. 1925년 법률은 트란실바니아 성직자와 평신도를 행정 회의에 혼합하고 주교들에게 상원 의석을 부여했다.[3] 니키포르 크라이닉, 요안 사빈, 두미트루 스터닐로에 같은 젊은 신학자들은 해외 유학 후 루마니아 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갈라 갈락시온을 제외하고, 이 시대 신학자들은 민족주의를 받아들여 학문적 저술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었다.[2]

1920년대 후반 A.C. 쿠자, 코드레아누 등의 등장으로 반유대주의가 급증했다. 교회 간행물에서도 반유대주의가 나타났다. 1925년 "Revista Teologică"는 부코비나 루마니아인들의 경제 상황에 대해 유대인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1930년대에 다양한 형태의 반유대주의를 발전시켰다.[4] 1927년 콘코르다트는 반가톨릭 반응을 일으켰다.[3]

나치 독일의 부상은 루마니아를 제국의 신학적 사상에 노출시켰다. 민족주의, 인종주의, 신학적 사상의 혼합은 반유대주의에 익숙했던 루마니아 정교회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1930년대 후반 니키포르 크라이니크, 니콜라에 네아가, 리비우 스탄 같은 신학자들의 저술에서 분명해졌다.[4] 1936년 크라이니크는 기독교 본질을 달성한 몇몇 인종이 우월하며, 유대인들이 구약 성서를 사용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4]

철십자단 단원 이온 모차와 바실레 마린이 스페인 내전 중 사망하자, 대규모 행렬이 조직되었다. 니콜라에 벌란 대주교와 비사리온 푸이우 대주교가 예배를 집전했다.[5] 장례식 후, "전승(Predania)" 저널이 창간되어 모차와 마린을 찬양하고 반-교회일치주의적 기사를 실었다.[3] 성 시노드는 프리메이슨을 규탄하고, 정치적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기독교적 관점"을 발표했다. 코드레아누는 시노드의 입장을 환영했다.[4]

1937년 옥타비안 고가-A. C. 쿠자 정부는 반유대주의 법안을 채택하여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미론 크리스테아 대주교는 유대인을 기생충으로 묘사하며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다.[6] 정교회는 극우 정당과 반유대주의 지식인들의 수사를 지지했다.[7] 많은 정교회 사제들이 극우 정치에 참여했다.[6]

1938년 수상 재직 중인 미론 크리스테아 대주교


교회는 정치에 개입했고, 카롤 2세가 비상 권력을 장악한 후, 미론 크리스테아 대주교는 1938년 루마니아 총리가 되었다. 성 시노드는 시민권을 증명할 수 없는 유대인의 개종을 금지했다.[8] 크리스테아는 "루마니아화"를 옹호했다. "사도(Apostolul)"는 그의 반유대주의 사상을 전파했다.[9] 1939년 크리스테아 사망 후, 성 시노드는 유대인 세례 금지 규정을 유지했다.[9] 크리스테아 사망 후, 비사리온 푸이우와 니콜라에 벌란은 출마를 거부했고, 니코딤 뭉테아누가 대주교가 되었다.[10]

1940년 카롤 2세 퇴위 후, 이온 안토네스쿠 원수와 철십자당의 친독일 정부가 권력을 잡았다. 문테아누 대주교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1941년 철십자당 봉기 시도 후, 체포된 9000명 중 422명이 정교회 사제였다.[11] 봉기 중 정교회 성직자들이 폭력에 연루되었다. 시비우 신학교 학생들은 유대인을 체포하고 귀중품을 강요했다. 부쿠레슈티 안팀 수도원 수도승들은 회당을 폭파했다.[12] 안토네스쿠 진압 후, 성 시노드는 반란을 규탄했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주교들의 보호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은 재활 기회를 제공했다.[12]

1940년대 초 니키포르 크라이닉 등은 유대 볼셰비즘을 지지했다. 1941년 이후 중앙 교회 신문에서 일반화되었다. 니코딤 대주교는 유대인을 적으로 규정하는 기사를 썼다.[13] 1943년 ''BOR''는 크라이닉의 책을 칭찬했다.[14] 지역 신문에도 반유대주의가 나타났고,[15] 군목들은 유대 볼셰비즘 신화를 조장했다.[16]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성 시노드는 선교부를 설립했다. 율리우 스크리반이 주도했고, 1942년 비사리온 푸이우가 인수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철십자단 전 회원이었다. 유대인 학대가 만연했고, 정교회 사제들이 참여했다.[12] 1944년 푸이우는 나치 독일에 도망쳤고, 전쟁 후 유죄 판결을 받았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사제들도 기소되었지만, 공산주의 검찰은 철십자당 연관성을 찾았다.[17] 예외적으로 부코비나의 티트 시메드레아 대주교와 트란실바니아의 니콜라에 벌란 대주교는 유대인을 위해 중재했다. 시메드레아는 유대인 가족을 보호했다.[18] 게오르게 페트레 신부는 크리베 오제로에서 유대인을 구한 공로로 의로운 사람들로 인정받았다.[19]

1944년 미하이 국왕의 쿠데타 후, 루마니아는 편을 바꿨다. 니코딤 대주교는 독일을 비난하고 "동쪽의 강력한 이웃"을 칭찬하는 서한을 작성했다.[20] 1945년 성 시노드 서한은 독일을 비난하고 정교회가 민주주의를 증진했다고 주장했다. 루마니아 군대와 새 정부 지지를 요청했다.[21] ''BOR''는 홀로코스트를 다루며 정교회를 유대인 구원자로 묘사했다.[22]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당 간부들이 1966년 네암츠 수도원 방문.


1947년 루마니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정교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 정권에 의해 관용되었지만, 공공 영역 접근이 제한되었다. 정권 탄압은 개별 신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교회 구성원들의 태도는 반대, 침묵, 협력 등 다양했다. 1947년 루마니아 노동자당은 숙청을 시작했다. 반대 주교와 대주교 13명이 체포되었다.[23] 1947년 법령은 성직자 정년을 부과하여 구체제 지지자들을 퇴직시켰다. 1948년 법률은 주교 선출에 대한 국가 통제를 제도화했다.[24] 주님의 군대는 1948년 진압되었다.[25] 그리스 가톨릭 교회 재산이 정교회로 이전되었다. 정부는 성직자 급여와 종교 출판을 지원했다.[26] 민주 사제 연합(1945)을 설립하여 지도부 협조를 얻으려 했다. 1953년까지 정교회 사제 300~500명이 수감되었고, 유스티니아누가 대주교가 되었다.[23]

1947~1948년 조치로 국가는 정교회 학교를 인수했다. 1958~1962년 운동으로 수도원이 폐쇄되고 성직자와 활동가들이 체포되었다.[26] 유스티니아누 대주교는 성명이 정권 기준을 충족하도록 주의했다.[27] 지도부는 체포가 종교 박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24] 1962년 국가 관계 해빙으로 교회 상황이 개선되었다. 민족주의 단체인 정교회는 정권의 파트너가 되었다. 1975년까지 교구 성직자는 12,000명이었고, 신학 논문을 출판했다. 성직자들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국내 정책 비판을 자제했으며, 소련과 헝가리에 대한 입장을 옹호했다. 1989년 대주교 2명이 대의원회에 참석했다.[27] 지도부는 1980년대 교회 철거와 체계화에 침묵했다.[28] 게오르게 칼치우-두미트레아사는 추방되었다.[26]

동방 정교회는 국가 복종을 정당화하는 "사회 사도직" 교리를 제안했다. 유스티니아누 대주교는 교회가 세속 정부에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파는 숙청되었다. 사회 사도직은 성직자들이 인민 공화국에서 활동하도록 촉구했다. 바실레스쿠 신부는 기독교 전통에서 근거를 찾으려 했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통치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주교들은 차우셰스쿠 정책을 지지했다.[29]

루마니아 혁명 이후, 정교회는 협력을 부인했지만, 여러 사제들이 세쿠리타테 협력을 인정했다. 니콜라에 코르네아누 주교는 "교회 매춘"을 비난했다.[30] 1986년 안토니에 플러머데알러 대주교는 교회 철거를 옹호했다.[31] 교회 지도부는 국제 사회에 알리려는 시도를 거부했다.[32] 1989년 혁명까지 종교 단체 반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테옥티스트 아러파슈 대주교는 차우셰스쿠를 지지했고, 처형 전날 비난했다.[33] 공산주의 제거 후, 대주교는 사임했다 복귀했고, 성 시노드는 "용기 없는 자들"에게 사과했다.[34]

루마니아 민주화 후, 교회는 국가 통제에서 해방되었지만, 국가 사무국은 재정 등을 통제한다. 국가는 인구 조사와 "종교의 필요"에 따라 교회에 자금을 지원한다.[3] 정교회는 급여에 1억유로 이상, 교회 건설에 수백만 유로를 지원받는다. 국가는 정교회 교구에 우대 조치를 취한다. 신학교와 대학 비용을 충당하며, 교직원은 공무원으로 간주된다.

공산주의 붕괴 후, 그리스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은 문화적, 종교적 말살을 주장했다.[4] 교회는 2018년 국민투표에서 동성 결혼 금지를 지지했다.[5][6] 교회는 동성애를 죄로 간주한다.[7]

루마니아 정교회는 몰도바 내 소수 신자들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며, 베사라비아 대교구에 속한다. 2001년 유럽인권재판소에서 몰도바 정부에 대해 승리했다. 베사라비아 대교구는 1927~1944년 베사라비아 및 호틴 대주교회의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받는다. 1947년 관할 지역은 러시아 정교회에 놓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몰도바에서 베사라비아 대교구로 소속 변경이 발생하고 있다.[8][9][10][11]

5. 2. 당면 과제

루마니아 정교회는 19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치권을 얻었으며, 1925년 총대주교청으로 승격되었다. 19세기 말 루마니아 정교회 신학 교육은 저개발 상태였으나,[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 확장에 따라 교회는 재편성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법 해석, 성직자 급여, 국가와의 관계 등 여러 과제에 직면했다.[1]

1920년대 후반 루마니아 정치에서 반유대주의가 급증하면서 교회 간행물에도 반유대주의가 나타났다.[1] 나치 독일의 부상은 루마니아를 제국의 신학적 사상에 노출시켰고, 이는 반유대주의에 익숙했던 루마니아 정교회에 영향을 주었다.[1] 1930년대 후반 신학자들의 저술에서 이러한 경향이 분명하게 나타났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 정교회는 유대 볼셰비즘 개념을 지지하는 선전을 제작하고, 트란스니스트리아 총독부에서 유대인 학대에 참여하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역할을 했다.[2] 그러나 일부 성직자들은 유대인을 위해 중재하기도 했다.[2]

1944년 쿠데타 이후 루마니아는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편을 바꾸었고, 교회는 새로운 정치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2]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교회는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 정권에 의해 어느 정도 용인되었다.[2] 교회는 국가에 협력하면서 생존을 모색했고, 일부 성직자들은 세쿠리타테의 정보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2]

1989년 루마니아 혁명 이후 교회는 국가 통제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3] 공산주의 붕괴 이후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동방 정교회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4]

최근 루마니아 정교회는 동성 결혼 금지를 지지하는 등 사회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5][6] 몰도바에서는 베사라비아 대교구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키시너우 및 몰도바 대교구와 관할권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다.[2]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몰도바 내에서 교구 소속 변경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8][9][10][11]

6. 다른 정교회와의 관계

루마니아 정교회를 포함한 대부분의 정교회 자치 교회들은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존중하며 정신적인 유대를 유지하고 있다.

정교회의 성사는 모든 정교회에서 유효하다. “루마니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는 조직명이며, 하나의 조직을 신앙하는 것처럼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 “조지아 정교를 믿는다”와 같은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2008년 11월에는 러시아 정교회와 어떠한 사전 협의도 없이 일본에 두 개의 작은 교구를 가진 "일본 지부"를 설치하고 두 명의 사제를 상주시켜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34]

'''자치 정교회(일부로부터만 승인받은 것을 포함)'''



'''자주 정교회(일부의 승인을 받은 것을 포함)'''

  • 에스토니아 사도 정교회 — 일부만 그 지위를 승인. 승인하지 않은 교회에서는 한 교구로 취급.
  • 시나이 정교회
  • 정교 오흐리드 대주교구 — 일부만 그 지위를 승인. 승인하지 않은 교회에서는 한 교구로 취급.
  • 중국 정교회 — 일부만 그 지위를 승인. 승인하지 않은 교회에서는 한 교구로 취급.
  • 일본 정교회 — 일부만 그 지위를 승인. 승인하지 않은 교회에서는 한 교구로 취급.
  • 핀란드 정교회


'''자주 관리 교회'''

  • 안티오키아 정교회 북미 대주교구
  •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계열 우크라이나 정교회
  • 에스토니아 정교회 — 러시아 정교회의 자주 관리 교회.
  • 재외 러시아 정교회
  • 몰도바 정교회
  • 라트비아 정교회
  • 기타

6. 1. 일본 정교회와의 관계 문제

2000년대, 주로 일본인 남성의 배우자로 일본에 정착한 루마니아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본 거주 루마니아 정교회 신자 수가 약 5000명에 달했다.[31]

2008년 루마니아 정교회 총대주교좌는 일본 정교회 측에 어떠한 연락도 없이 "루마니아 정교회 일본 지부" 설립을 결정했다. 도쿄나고야~미노가모에 사제 2명이 상주하며 활동하고 있다.[32] 이로 인해 일본 정교회와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31],[34]

날짜사건
2008년 8월일본 거주 루마니아 정교도가 루마니아 정부에 사제 파견을 요청.[32] 루마니아 총대주교좌는 루마니아 정교회 일본 지부 설립을 결정.[32]
2008년 11월2명의 루마니아 정교회 사제가 도쿄와 나고야에 부임.[32]
2008년 11월 - 2016년 1월도쿄에서는 가톨릭 교회 국립 집회소를 빌려 포교.[33]
2011년 3월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놀란 나고야의 사제가 귀국.[31]
2013년 8월사제 1명이 새로 부임.[33]
2017년 4월~도쿄 교회 가톨릭 교회 국립 집회소를 매입.[33]



루마니아 정교회를 포함한 대부분의 정교회 자치 교회들은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존중하며 정신적인 유대를 유지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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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Anti-Semitic issues in Orthodox publications, years 1920-1944 Civitas Europica Centralis 2014
[3] 웹사이트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 Embassy of the United States Bucharest, Romania https://web.archive.[...] 2015-03-05
[4] 웹사이트 The Romanian Greek-Catholic Community is facing a cultural and religious wipe-out – letter to US Secretary of State Hillary Clinton http://english.hotne[...] 200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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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Înaltpreasfinţitul Andrei, Mitropolitul Clujului, Maramureșului și Sălajului https://www.mitropol[...] 202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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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웹사이트 Ierarhi https://mitropoliaba[...] 2024-06-29
[20] 웹사이트 Mitropolia https://www.mitropol[...] 2024-06-29
[21] 웹사이트 Înaltpreasfințitul Mitropolit Serafim al Germaniei, Europei Centrale și de Nord https://mitropolia-r[...] 2024-06-29
[22] 웹사이트 Biography https://www.mitropol[...] 2024-06-29
[23] 서적 Dicționarul teologilor români (Dictionary of Romanian Theologians) http://biserica.org/[...] Univers Enciclopedic Ed. 1996
[24] 문서 The ROC severed full communion with the Ecumenical Patriarchate in 2018, and later severed full communion with the primates of the Church of Greece, the Patriarchate of Alexandria, and the Church of Cyprus in 2020.
[25] 문서 Autocephaly or autonomy is not universally recognized.
[26] 문서 Semi-autonomous part of the Russian Orthodox Church whose autonomy is not universally recognized.
[27] 문서 UOC-MP was moved to formally cut ties with the ROC as of May 27th 2022.
[28] 문서 Part of the Communion of Protestant Churches in Europe
[29] 문서 Part of the Romanian Evangelical Alliance
[30] 웹사이트 OCA - Q&A - Greek Orthodox and Russian Orthodox http://oca.org/quest[...]
[31] 서적 2012
[32] 서적 2012
[33] 문서 参考文献5
[34] 서적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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